남한에서는 백제 패망의 원인에 대해 통상적으로 의자왕의 사치와 향락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삼천 궁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주장이 신라 등 승자에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는 비판이 많다. 오히려 의자왕과 귀족들의 갈등, 내부 분열, 신하들의 배신 등을 원인으로 보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백제 패망의 원인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의자왕'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사전은 의자왕이 백제의 마지막왕이며 무왕의 맏아들이라고 소개했다.

북한 사전은 초기 의자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이후 행동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서술했다.

사전은 즉위 초기 의자왕이 당나라 세력을 끌어들여 영토를 확장해 보려는 신라봉건 통치배들에게 타격을 주었다고 설명했다. 642년 백제가 나라의 모든 힘을 기울여 신라의 40여개 성을 빼앗고 643년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가 당나라에 드나드는 관문인 당항성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 645년 당 태종이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제는 군사를 동원해 신라의 7개 성을 빼았고 고구려와 동맹해 655년 신라의 30여개 성을 함락했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이것이 외세와 야합한 신라봉건 통치배들의 배족적 망동에 타격을 준 것으로 당시 적절한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후 의자왕의 행적에 대해 사전은 부정적으로 서술했다.

사전은 "의자왕은 신라와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지고 대외 정세가 복잡한 조건에서 나라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대책을 세울 대신 고구려의 힘만 믿고 극도의 부화와 안일을 일삼음으로써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형편을 더욱 험악한 상태에 빠트렸다"며 "봉건 통치에 대한 인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의자왕은 어떻게 든 왕권을 유지하려고 41명의 자기 아들들에게 좌평 벼슬과 식읍을 주어 인민들을 통치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에 대해 의견을 표시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가혹한 탄압을 했다. 좌평 성충이 왕에게 충고했고 해서 그를 감옥에 가두어 죽게 했다"고 설명했다.

백제가 약화된 원인이 스스로 국력을 강화하지 못하고 고구려의 힘에 의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왕권을 강화하고 반대 의견을 탄압했다는 점도 문제로 꼽았다. 의자왕이 아들들을 좌평에 임명하고 성출을 가둔 것은 왕권과 귀족, 신하들의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사전은 "660년 신라 통치배들의 배족적인 청병 요구에 의해 당나라 군대가 백제땅에 침공했다"며 "소정방을 두목으로 하는 13만명의 당나라 수군, 육군과 5만명의 신라군이 수도성으로 육박해 왔다. 계백 장군을 비롯한 백제 군인들과 인민들이 용감하게 적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사태가 위급해지자 의자왕은 태자를 데리고 웅진으로 도망쳤고 수도성이 함락되자 7월 18일 적들에게 항복했다. 의자왕은 당나라로 끌려가 화병으로 죽었다"고 설명했다.

조선대백과사전은 의자왕의 사치나 향략 그리고 삼천 궁녀에 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았다. 북한에서는 이런 주장이 사실이 아니거나 신라 사관들의 일방적 주장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백제 패망의 원인이 외부 의존과 내부 갈등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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