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고종의 비였던 명성황후에 대해 북한은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명성황후가 진보적인 경향을 탄압했으며 갑신정변을 실패하게 했고 청나라(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외세를 끌어들여 한반도를 열강의 각축장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명성황후'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북한 사전은 명성황후가 조선봉건왕조 26대왕 고종의 처라고 설명했다. 사전은 명성황후가 봉건 양반 민치록의 딸로 1866년 16살에 왕비가 됐다며 당시 고종은 15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 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고 밝혔다.

사전은 왕비가 된 명성황후가 양오빠인 민승호를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리고 이어 민씨 일족을 주요 관직에 등용했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대원군의 집정으로 말미암아 정계로부터 떨어져나간 대원군 반대파를 끌어모아 자기 기반을 꾸렸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명성황후와 대원군 사이의 알력이 날카로운 정치적 대립으로 엉켜졌고 명성황후는 정치적 암투 끝에 1873년 대원군을 정권에서 몰아내고 정권을 틀어줬다고 설명했다.

여기까지는 명성황후의 행적을 객관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명성황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사전은 "그후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실시한 정책들을 모조리 뒤집어 놓았다"며 "명성황후는 반동적 수구파 집단을 꾸리고 봉건 양반들과 지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모든 진보적 경향을 무조건 탄압하며 인민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애국적 군인들과 서울 시민들은 명성황후 일당들에게 항거해 투쟁했으며 직접 왕궁에 쳐들어가 명성황후를 처단하려고 했다"며 "이때 명성황후는 궁녀로 변장하고 충주로 도망해 비밀리에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여 군인폭동을 진압하는 극히 반동적인 정책을 실시했다"고 지적했다. 임오군란을 설명한 것이다.

사전은 1884년 조선에서 일어난 첫 부르주아 개혁운동인 갑신정변도 명성황후의 흉책에 따라 청나라의 무력간섭으로 실패했다고 비판했다.

사전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고 민씨 일족의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 명성황후는 대외적으로는 사대투항주의적 외세의존정책을 실시했다"며 "명성황후는 집권 초기에 일본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이름 아래 일본 침략자들에게 굴종해 놈들을 우리나라에 끌어들였으며 그 다음에는 이이제이를 구실로 미국, 유럽 자본주의 침략자들을 연이어 끌어들였다. 1894년 청일전쟁 이후에는 러시아와 결탁했다. 명성황후의 이런 대외정책은 19세기말 조선을 자본주의 침략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을 위한 각축장으로 전변시켰다"고 주장했다.

사전은 조선 침략에서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던 일제가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895년 8월 일본 공사 미우라를 시켜 불법적으로 왕궁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죽이게 했고 1897년 왕실은 그를 명성황후로 책봉했다고 설명했다.

북한 사전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대립은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대원군을 몰아낸 후 오히려 봉건적인 정책을 펼치고 진보적 정책을 탄압했다고 비판했다. 또 북한 사전은 임오군란의 진압, 갑신정변 실패와 관련해서도 명성황후의 책임을 지적했다.

결정적으로 북한 사전은 명성황후가 외세를 끌어들인 것을 문제삼았다. 명성황후의 대외정책이 조선을 열강의 식민지 쟁탈전을 위한 각축장으로 전변시켰다는 서술에서 조선이 망한 것에 명성황후의 책임도 있다는 점을 북한이 지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 사전은 당국의 사전 분석과 검열 등을 거쳐서 제작된다고 한다. 즉 사전에 나온 해석은 북한 당국의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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