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발칼럼] 21세기에 다시 등장한 꺼삐딴 리
'꺼삐딴 리'는 전광용 서울대학교 교수가 1962년 발표한 단편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 이인국은 일본제국주의 시대 평양에서 병원을 운영했다. 그는 잠꼬대도 일본어로 하는 친일파로 일본인들과 친일파 부호들만 치료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치료하지 않고 병원에서 쫓아냈다.
광복이 된 후 소련군이 평양에 주둔하게 됐고 이인국은 독립운동가들의 신고로 체포, 구금된다. 이인국은 감방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소련군 장교들에게 아부하면서 친일파에서 친소파로 전향한다. 이때 불렸던 그의 별칭이 캡틴의 러시아어 발음인 꺼삐딴 리였다.
이인국은 자신의 아들을 모스크바로 유학 보낼 만큼 소련에 충성하는 듯 했지만 6.25 전쟁이 발발한 후 남한으로 내려온다. 그는 남한에서 미군에 붙어 친소파에서 친미파로 또 다시 전향한다. 이인국은 자신의 딸을 미국인에게 시집 보내고 둘째 아들의 미국 유학도 준비하게 된다.
이 소설은 광복, 6.25 전쟁 전후로 친일, 친소, 친미로 변절하는 기회주의자 이인국을 비판하고 있다. 소설이 발표된 후 화제가 됐던 것은 내용이 너무나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격동의 시기에 수많은 기회주의자들이 활개쳤으며 그들은 잘먹고 잘살았다.
필자가 '꺼삐딴 리' 이야기를 꺼낸 것은 통일, 남북 문제와 관련해 이인국 같은 사람들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8년 4월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고 그해 6월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다. 남북 관계가 좋아지면서 수많은 자칭 남북 전문가, 북한 전문가들이 나타났다.
정부 부처와 기관들이 앞다퉈 남북 협력 과제를 찾기에 혈안이 됐다. 언론사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보도를 하면서 '남북은 한민족'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사별로 통일, 남북 취재 TF를 만들고 통일전문기자, 북한전문기자들이 생겨났다.
그런데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이 당선된 후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북한은 '적'이며 남북 화해, 협력이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금기시 됐다.
정부부처, 기관은 물론 사람들도 언론사들도 변했다.
필자는 2018년 한 전문가가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제가 대한민국에서 남북 협력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입니다. 의원님들, 공무원분들 남북 화해, 협력 정책에 대해서 고민할 것 없이 저에게 문의하시면 됩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 후 자칭 최고의 남북 협력 전문가라고 하던 그는 반북 선봉장이 됐다. 북한을 비난하면서 북한 정권 교체를 외쳤다.
그 사람 뿐만 아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렇게 180도 바뀌었다. 통일과 남북 협력을 외치던 사람들이 반북과 좌파를 외치는 것을 수차례 봤다.
남북 협력이나 통일을 앞장서 주장하다가 어느 순간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마치 범죄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언론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김정은 총비서의 사진을 1면톱 사진으로 게재했던 한국 언론사들이 북한은 '악마'라고 소리쳤다. 남북 취재 TF는 전부 해체됐고 반북 기사만 쏟아냈다.
통일부를 비롯한 정부 부처와 공무원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친일에서 친소로 전향했던 이인국이 다시 친미로 전향했던 것처럼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곳곳에서 갑자기 북한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남북 화해, 협력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하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고 오는 3월 탄핵 여부가 결정될 것으로 보이면서 눈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확정되면 윤석열 정부의 대북, 통일 정책을 비난할 기세다.
이어서 차기 대선이 진행된다면 남북 화해, 협력의 깃발을 다시 꺼내 들고 전문가라고 대선 캠프를 찾아갈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그중에는 남북 협력에서 반북으로 돌아섰다가 다시 돌아서는 사람들도 있을 듯 하다. 언론사들과 정부, 공공 기관들 역시 비슷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기각되고 돌아온다면 그들은 다시 그대로 반국가세력, 친북세력 척결을 외칠 것이다.
즉 양쪽에 각각의 깃발을 들고 눈치를 살피고 있을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 언론사들이다.
물론 사람이나 기관이나 기업이나 상황 변화에 맞춰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다른 일을 하거나 최소한 침묵하다가 다시 남북 협력을 이야기하는 것과 '협력-> 반북-> 협력'을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바꿔 주장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전자는 인내하며 때를 기다린 것이지만 후자는 그냥 자신의 영달과 이익을 위해서 이리저리 왔다갔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본인의 소신이 보수라서 계속 반북을 하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만 기회주의자들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황이 바뀌면 또 자신의 입장을 바꿀 것이기 때문이다.
남북 협력, 통일 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심이다. 진심은 한결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손해를 보고 위험에 직면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이라도 손해 보기 싫어서 눈치 보고 갈지자 행보를 하는 것은 진심이 없는 것이다.
진심이 없는 사람들은 남북 화해, 협력, 통일은 물론 안보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대한민국의 현실이 소설 꺼삐딴 리 처럼 기회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 꺼삐딴 리가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