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에서는 세종대왕이 존경받는 위인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세종대왕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북한은 세종대왕의 문화, 과학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봉건군주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세종대왕 통치 시기에 오히려 봉건적 압박이 더욱 심화됐다고 보고 있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세종대왕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백과사전은 "세종은 조선봉건국가의 4대 왕으로서 태종의 셋째 아들이다"라며 세종은 비교적 풍부한 학문지식을 소유한 봉건군주로서 통치기간 적극적인 문화장려정책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백과사전은 세종대왕이 1420년 학자들을 모아 집현전이라는 학술기관을 설치하고 역대의 책들을 수집, 연구했으며 세계에서 제일 먼저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강우량을 측정하게 했다고 소개했다. 

또 그가 왕궁 안에 언문청을 설치하고 성삼문, 최항, 정인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에게 연구를 진행하게 해 1443년 12월(양력 1444년 1월)에는 28자로 된 우리나라 문자인 훈민정음을 만드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백과사전은 세종대왕 통치시기 불교가 억제되고 유교가 장려됐으며 고려사, 역대병요,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 여러 부문의 도서들이 수많이 편찬됐고 대외적으로는 명나라,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됐다고 지적했다. 또 두만강 연안에 6진, 압록강 중류 연안에 4군이 설치됨으로써 북쪽 지방 방비가 강화됐다고 밝혔다.

백과사전은 "세종 통치 시기 봉건문화가 발전하고 나라의 대외적 지위가 높아졌다"면서도 "봉건군주로서 세종의 모든 활동과 그 결과는 봉건지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백과사전은 "이 시기 인민대중에 대한 봉건적 압박과 착취는 보다 째여지고 강화됐다"며 "토지별 농사 작황에 따르는 토지등급이 규정되고 조세수탈을 위한 공법이 제정됐다"고 소개했다. '째여지다'는 '째어지다'의 북한식 표현이다. 째어지다는 정도가 아주 심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백과사전은 "세종 통치 시기 조선봉건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기초로 된 경제육전이 증보됐다"며 "그 결과 인민대중에 대한 봉건적 억압과 착취는 더욱 강화됐으며 이로 말미암아 평양의 대성산에서는 농민들의 대규모적인 투쟁이 계속됐다. 이 사실은 봉건 통치가 째여진 시기에도 피압박 인민대중의 처지는 여전히 가혹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밝혔다.

조선대백과사전의 내용은 북한 당국의 공식적인 입장을 담고 있다고 한다. 내용으로 볼 때 북한은 세종대왕의 다양한 업적을 인정하고 있지만 봉건왕조라는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봉건왕조의 법제가 정비되고 중앙집권화가 되면서 주민들에 대한 압박과 착취가 강해졌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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