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도 황산벌 전투의 영웅 계백 장군에 대해 애국 명장이라며 높게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계백 장군과 싸운 화랑 관창에 대해서는 통치자들의 요구에 맹종했고 부질없이 용감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계백' 장군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사전은 계백 장군을 백제 시기의 애국 명장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사전에 따르면 계백 장군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평가를 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이 "계백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라를 지켜 용감하게 싸우다가 최후를 마쳤다. 애국명장 계백의 이름과 공적은 역사와 더불어 전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사전은 백제봉건 통치배들이 부화방탕하고 안일한 생활에 파묻혀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당나라와 야합한 신라의 대군이 백제를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660년 6월~7월 5만명의 신라군이 백제를 공격해 왔을 때 계백은 달솔(제2벼슬등급)로서 장군으로 돼 결사대 5000명을 거느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황산벌로 달려나갔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이때 계백이 망국의 위험이 닥쳐온 것을 알고 자기 처자식들이 장차 망국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들을 죽이고 전선으로 떠났으며 황산벌 싸움을 앞두고 병사들 앞에서 용기를 잃지 말고 모두 분발해 승리를 이룩하고 나라를 지키자고 호소했다고 밝혔다.

사전은 5만의 신라군대가 3군으로 편성해 침공해왔고 계백은 신라의 3군을 맞받아 물리치기 위해 5000명의 백제군을 3개 진지에 나눠 배치했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백제군이 계백의 지휘 아래 7월 9일 10배가 넘는 적과 맞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으며 백제군이 신라군의 대규모 공격을 무려 4차례나 짓부셔버리고 수도에 대한 적의 공격 기도를 일정하게 늦춰 놓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역량상 현저한 차이로 백제의 방어진은 돌파당하고 계백은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사전은 전했다.

 

사전은 황산벌에서 계백에게 죽은 화랑 관창도 소개하고 있었다.

사전은 관창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해 어려서 화랑이 됐다며 660년 신라는 당나라와 백제에 대한 침공을 감행했고 이때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의 장군 계백의 군사와 맞세게 됐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관창은 이 전투에서 공을 세워야 벼슬길에 오를 수 있고 공명과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아버지 품일의 말을 듣고 백제 군사들 사이로 돌진했으나 계백에게 붙잡혔다"며 "계백은 그의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죽이지 않고 그냥 살아 돌아가게 했다. 관창은 여기서 교훈을 찾는 대신 부질없는 용감성을 발휘해 다시 백제군과 맞섰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계백이 다시 사로 잡은 관창의 목을 베여 그의 말 안장에 매여 돌려보냈다며 이처럼 관창은 신라봉건국가와 봉건국왕에게 충실하라는 통치배들의 요구에 맹종했다고 소개했다.

계백 장군에 대해서는 남한과 북한 모두 애국심이 강하고 명장이었으며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보고 있다.

반면 계백과 싸운 관창에 대해서는 남한에서 그의 용기와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을 강조하고 있지만 북한에서는 부질없는 용감성을 발휘하고 신라에 맹종한 인물로 보고 있다. 이는 북한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신라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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