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어...지나친 건가요? 차를 돌려야 겠습니다." 대전의 인근 계곡을 따라 난 도로를 달리던 택시가 멈췄다. 도로 주변에는 나무들이 빼곡했다. 택시를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가며 주변을 살피자 차량 2~3대가 지나갈 정도의 공간이 보였다.

그곳으로 들어서자 계곡 도로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넓은 공터가 펼쳐졌다. 그곳이 바로 6.25 전쟁 당시 학살된 피해자들의 유골이 발견된 골령골이었다.

6.25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삶을 앗아갔다. 한반도 곳곳에 비극의 상처를 남겼다. 70여년이 넘었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필자는 그중 유해 발굴과 진상규명이 진행되고 있는 대전 골령골을 직접 방문했다.

대전역에서 택시를 타고 골령골 근처에 다달았음에도 비극의 현장이 그곳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었다. 택시의 내비게이션이 가르키는 곳으로 정확히 도착한 후에야 유해 발굴 현장임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골령골은 으슥하게 드러나지 않는 곳이었다.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인근에 가옥들도 많아졌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인적이 드문 산골이었을 것으로 생각됐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골령골은 말 그대로 황량한 모습이었다. 공터에 놓여진 작은 위령비와 발굴 현장 곳곳에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노란 리본들이 그곳이 비극의 현장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대전 골령골에서는 2007년 2개 지점에서 34구가 발굴된 후 2015년에 18구가 발굴됐다. 2020년부터 발굴이 본격화 되면서 유해가 쏟아져 나왔다.

6.25 전쟁 당시 최소 1800명에서 최대 7000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미 발굴된 유해만 약 1250구에 달한다. 필자가 방문한 현장부터 계곡을 따라 1차, 2차, 3차 연이어 유해들이 발굴됐다.

유해가 발굴된 현장의 거리만 1킬로미터에 달한다. 때문에 골령골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슬픈 이름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것일까? 

골령골 진실 규명과 발굴을 돕고 있는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은 그동안 조사, 분석한 내용을 설명했다.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 골령골에서 유해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 골령골에서 유해 발굴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대전 지역에서 골령골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전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진실을 드러내놓고 언급하는 사람들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려준 것은 미군과 영국 종군 기자의 기록이었다. 현장에 함께 있었던 미군은 한국군이 수많은 사람들을 골령골로 데려온 사실을 기록했다. 또 현장 사진들도 남겼다. 영국 데일리워커의 기자 역시 현장의 사진과 기록들을 남겼다. 

1950년 촬영된 사진의 지형과 기록을 토대로 골령골에 희생자들이 매장된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당시 상황을 조금이나마 재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골령골에서는 다양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6.25 전쟁 전후의 사건들이 연관돼 있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사람들의 희생이 컸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대전 출신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수감된 사람들이 많았다. 

제주 4.3 사건 후 연루된 제주 주민들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됐다고 한다. 제주 4.3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임재근 소장에 따르면 수백 명에 달하는 제주도 출신 희생자들이 확인됐다. 또 여수순천 사건 관련자들 역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보도연맹사건 관계자들도 골령골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임재근 소장은 "당시 정부 정부, 군, 경찰 등의 고위 관계자들이 좌익에 연루된 사람들에게 사면을 약속하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도록 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들은 직접 대전 지역 보도연맹 간부를 맡아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사면장을 발부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념과 상관없이 단순하게 공무원들의 실적 때문에 또는 가입하면 준다는 쌀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에 가입했다"며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사면을 약속하며 가입을 독려했던 정부가 돌변했다"고 설명했다.

군과 경찰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재판이나 절차없이 골령골로 데려간 후 총살했다. 6.25 전쟁 전후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던 수천명이 실종처리됐고 유족들은 그들이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다른 지역에서 대전형무소로 이송되던 사람들도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중이라고 해도 교전국 포로를 학대, 살해하는 것은 전쟁범죄다. 6.25 전쟁보다 앞서 발발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포로를 살해한 사람들이 전쟁범죄자로 처벌받았다.

하물며 골령골 희생자들은 포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 비무장의 민간인들이었다. 재소자들이라고 해도 대전형무소에서 부산, 거제 등 후방으로 이송이 이뤄졌어야 했다. 

6.25 전쟁 전후 반역 혐의를 받아 총살된 군인들의 조차도 재판 절차를 진행하고 대통령의 최종 승인 후 집행이 이뤄졌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학살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임재근 소장에 따르면 아직 규명돼야 할 부분이 많다. 당시 사건에 연루된 장차관급 정부 관계자들 조차 자신들은 상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재근 소장은 학살에 참여한 일반 군인들도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였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당시 상황을 담은 자료와 증언을 분석해보면 보면 군 지휘관이 뒤에서 권총을 들고 군인들에게 충격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군에서 총살은 5명 정도 인원 중 1명의 총에 총알을 넣고 5명이 원거리에서 동시에 쏘도록 했다.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였다.

그런데 골령골 현장 사진을 보면 수천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을 군인들이 1대1로 근거리에서 사격하도록 했다. 

명령에 따라 총격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군인들은 평생 지옥같은 트라우마와 고통에 시달렸을 것이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골령골의 슬픔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작은 비석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추모비 조차 편히 서 있지 못한 것이다. 

이는 누군가 비석을 수차례 훼손하려 했기 때문이다. 7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념의 눈으로 골령골 학살을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 골령골 학살과 관련된 기록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임재근 평화통일교육연구소 소장이 골령골 학살과 관련된 기록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골령골 진상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수습하지 못한 유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계속 진행될 예정이다.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출처: 강진규 기자 촬영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정부가 골령골 희생자들을 공식적으로 추모하기로 한 것이다. 행정안전부는 2024년 골령골에 '진실과 화해의 숲'을 조성할 계획이다.

필자가 골령골 현장을 돌아보는 동안 한 종교단체 관계자들이 희생자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냈다. 고요하고 황량한 골령골에 위령제 소리가 울려퍼졌다. 

푸른 하늘에 태양은 뜨거웠지만 위령제가 진행되는 현장에서는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저작권자 © NK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