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을 높게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은 지난 2월 27일 홈페이지를 통해 강감찬 장군을 소개했다.

대학은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고려의 강감찬 장군은 우리 민족의 반침략 투쟁 역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명장들 중 한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다”며 “우리 인민들 속에 널리 알려진 강감찬은 거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투쟁에서 커다란 공적을 남긴 애국명장”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은 역사 기록에 강감찬 장군의 출생과 관련해 신비화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어느 날 밤 지방으로 파견돼 가던 고려왕의 사신이 시흥군을 지나게 됐는데 밤하늘의 큰 별이 어느 민가에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사신이 곧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는데 마침 그 집 여인이 사내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출생한 아이가 범상치 않다고 여긴 사신은 그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그가 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강감찬 장군이였다는 것이다.

대학은 예로부터 우리 인민들이 역사의 명인들을 존경하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그들의 출생과 그 성장 과정에 있었던 일들을 천지조화의 변화와 결부시켜서 많은 전설들을 창조했다며 강감찬 장군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도 그런 이야기들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대학은 강감찬 장군이 남달리 외소하고 용모도 보잘 것 없었으며 옷차림도 수수해 평시에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았지만 조정에 나서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결단성이 있었고 매사에 엄격했다고 소개했다.

대학은 강감찬 장군이 남달리 강한 애국심과 뛰어난 지략으로 거란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고려인민들의 투쟁을 지휘했다고 밝혔다.

강감찬은 1010년 11월 40만 대군에 의한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무능한 고려봉건통치배들의 투항주의적 주장을 단호히 반대하고 역량을 재정비해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주장을 실현시킴으로써 전쟁승리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또 거란의 2차 침입을 물리친 후 서경유수로 있던 강감찬은 1018년 10월 거란의 새로운 침공에 대처해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됐으며 그해 12월 거란이 고려에 대한 3차 침공을 감행했다고 대학은 설명했다. 상원수가 된 강감찬은 20만8300여명의 고려군을 총지휘해 지휘부는 영주(오늘의 평안남도 안주)에, 방어군의 기본주력은 영주와 그 이북지대에 배치하고 적을 타격할 면밀한 작전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의 지휘밑에 고려의 기병 1만2000명은 압록강의 흥화진계선에서 미리 매복했다가 적의 주력이 그곳으로 밀려들자 준비했던 소가죽제방을 터트려 적들을 일대 혼란 속에 빠트린 후 총공격으로 적을 물리쳤다고 전했다.

대학은 고려군이 1019년 2월 대포위 작전으로 거란군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준 구주전투를 벌렸다며 이 전투를 가리켜 구주대첩(귀주대첩)이라고 한다고 지적했다. 당시 거란군은 10만명 가운데 겨우 수천 명만 살아 돌아갔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대학은 고려 인민들의 투쟁이 고려에 대한 거란의 침입을 종식시키고 인민의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주의 정신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고려의 이름을 온 세상에 남긴 역사적인 사변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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