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연개소문에 대해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리고 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를 외세로부터 지켜낸 명장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영류왕 살해와 자식들에게 내분의 씨앗을 심었다는 비판도 있다.

북한에서는 연개소문을 외세로 부터 나라를 구한 명장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정변 역시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역사적 사변이라고 보고 있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연개소문'과 '연개소문의 정변'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고구려 시기의 애국명장이라고 정의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어려서부터 무술과 병법을 익혔으며 풍채가 좋고 성품이 호탕했고 아버지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서부대인이 됐다고 소개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642년초에 부여성으로부터 발해만에 이르는 1000여리 장성을 쌓는 일을 책임지고 추진했으며 이 시기 고구려의 집권자들이 외세의 압력에 굴종해 양보정책을 쓰면서 강경정책을 주장하는 그를 살해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642년 10월에 정변을 일으키고 영류왕을 죽인 후 왕의 조카 보장왕을 왕으로 세웠으며 자신이 최고 벼슬인 막리지가 돼 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고 밝혔다. 이 정변 후 그가 강경한 대외정책을 실시했으며 대내적으로는 통치체제를 정비해 고구려 봉건 국가의 국력을 강화하는데 힘썼다고 덧붙였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645년, 647년, 648년 당나라가 고구려에 침입해오자 고구려 군민을 능숙하게 조직, 지휘해 이를 물리쳤으며 그후 650년대와 660년대초에도 여러 차례 침입한 당나라 군대를 모두 물리치고 승리했다며 이로 인해 그는 명장으로 역사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의 정변이라는 항목도 담고 있었다. 사전은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간섭과 침략 야망이 극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류왕을 비롯한 고구려 봉건통치배들은 당나라의 압력과 간섭에 굴종해 민족적 이익을 저버리고 양보정책을 실시했다"며 "서부대인이었던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간섭을 배격하고 국왕을 비롯한 집권 관료들의 투항주의적 행위를 반대했다. 그러자 봉건통치배들은 642년초 그에게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가서 천리장성축성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위험한 정세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고 평양으로 돌아온 기회에 정변을 단행하려고 했으며 국왕을 비롯한 통치배들도 연개소문이 수도로 돌아온 기회에 그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연개소문이 선수를 써서 자기 관할 부대의 열병식을 조직하고 여기에 투항주의적 문무고관 100여명을 초대한 다음 사열을 받으려고 모인 군사들을 동원해 그들을 모조리 처단했으며 이어 왕궁에 쳐들어가 왕을 죽여버렸다고 전했다. 연개소문의 정변 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사전은 "이 정변은 그것이 봉건 지배층 안에서 벌어진 정권쟁탈전이었던 만큼 지배계급의 계급적 제한성을 극복할 수는 없지만 당시 왕을 비롯한 부패한 통치배들이 당나라에 아부굴종하던 행위를 반대한 것으로 인해 고구려 역사발전에 긍정적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다"며 "즉 이 정변은 나라 앞에 조성된 정세를 바로잡고 고구려의 자주권을 고수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된 하나의 역사적 사변이었다"고 정의했다.

북한은 연개소문의 정변에 대해 지배계급의 정권쟁탈을 위한 싸움의 성격이 있었다면서도 자주권 확보를 위한 사변이었다며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영류왕에 대해서는 양보정책과 투항주의적이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북한은 연개소문의 자주성과 외세의 침입을 막아낸 업적에 초점을 맞춰 그를 애국명장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에서도 연개소문에 대해 당나라에 맞선 영웅의 이미지가 널리 퍼져있다. 다만 남한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해 독선적이고 독재자의 모습을 갖고 있는 복잡하고 입체적인 인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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