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바라본 일본 메이지유신은?
북한이 바라본 일본 메이지유신은?
  • 강진규 기자
  • 승인 2020.07.13 2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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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의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던 메이지유신(명치유신)에 대해 북한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북한은 봉건 국가였던 일본이 자본주의 체제로 변화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로의 변화 즉 부르주아 혁명이 불완전하게 진행돼 봉건적 자본주의가 자리잡게 됐으며 그로 인해 주변 국가를 침략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NK경제는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가 편찬한 조선대백과사전(스마트폰용) 중 '명치유신'에 관한 내용을 확인했다. 

북한 사전은 명치유신 즉 메이지유신이 '1868년 일본에서 수행된 불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메이지유신은 일본에서 200여년 간 지속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일왕 중심의 근대 국가로 탈바꿈한 사건을 가르킨다.

북한 사전은 메이지유신에 대해 아주 자세히 과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사전은 메이지유신이 "봉건적 도쿠가와 막부통치가 뒤집혀지고 군사 봉건적인 일본이 자본주의길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며 "메이지유신은 도쿠가와 막부 통치말기에 앙양된 인민들의 계급투쟁을 역사적 배경으로 해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사전은 18세기부터 일본의 봉건사회 내에서 자라난 자본주의적 관계가 막부통치의 경제적 기초를 무너트리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막부 봉건 지배층의 극심해지는 착취와 자본주의 침략자들의 약탈로 살아갈 수 없게 된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이 반막부 투쟁을 줄기차게 벌렸다며 일본 인민 대중의 반봉건 투쟁은 막부통치를 밑뿌리부터 뒤흔들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사전은 그러나 그들의 투쟁이 분산적으로 진행됐고 결국에 가서는 일본 서남부 봉건세력과 신흥 부르주아들에게 이용당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사전은 반막부 세력의 중심을 이룬 것은 상업과 수공업이 발전한 사스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일본 서남부 봉건 영주 다이묘들이었다며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차별 대우에 반감을 품고 인민 대중의 반봉건 투쟁에 편승해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탈취하려고 했다고 분석했다.

사전은 당시 일본 신흥 부르주아가 봉건영주들과 깊은 경제적 연계를 가졌으며 그 역량이 미약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그들은 부분적인 부르주아 개혁을 기대했을 뿐 봉건 제도의 완전한 청산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인민 대중의 투쟁을 무서워하면서 일왕을 두목으로 한 반막부 봉건세력과 결탁했다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박막부파 세력으로 일본 하급무사들이 있었다며 이들이 자신의 착취적 본성으로부터 인민 대중의 혁명적 진출을 적대시하고 자기들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줄 서남부 봉건영주들의 정권을 요구했다고 북한은 해석했다.

북한은 1863~1864년 일본 시모노세끼와 가고시마에 대한 자본주의 열강 연합 함대의 포격과 서남부 봉건세력의 군사적 패배를 계기로 종래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외세를 배격한다는 세력이 약화됐다고 지적했다. 대신 조슈, 사스마에서는 일왕을 내세우며 외래 자본주의 나라들에 접근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 일본을 자본주의적으로 개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흥 부르주아와 밀접히 연결된 봉건 세력이 실권을 장악했다고 해석했다.

북한 사전은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 열강은 처음에는 일본 막부 정권을 지지했으나 그들의 무능력함을 알고 태도를 바꿔 반막부 세력을 지원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런 이유로 일본에서의 부르주아 혁명이 애당초부터 군사 봉건적 성격을 띤 불철저한 것이 됐다고 사전은 지적했다.

북한 메이지유신 해석에 사카모토 료마는 없다 

사전은 막부 정권이 1866년 조슈번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했으나 패배했고 1867년 조슈, 사스마번이 군대를 교토에 진출시키고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장군 요시노부에 대해 정권을 일왕에게 넘겨줄 것을 강요했다고 설명했다. 인민들의 투쟁과 반막부파의 공세에서 타격을 받고 출로를 찾지 못하게 된 요시노부는 그해 10월 반막부파에 굴복하고 그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1868년 1월 3일 반막부파는 일왕의 이름으로 도쿠가와 막부의 폐지와 일왕 정권의 수립 왕정복고를 선포했다고 사전은 전했다.

사전은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의 이전 영지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반막부파 세력의 거점인 교토로 진격했으나 후시미 전투에서 격파당했다고 설명했다. 또 반막부파군이 1868년 4월 에도(도쿄)를 점령하고 다음해 5월까지 동북 지방과 홋카이도를 점령했으며 이로 인해 메이지 일왕을 우두머리로 하는 지주, 부르주아 정권, 일왕 절대주의 정권이 전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다는 것이다.

사전은 일본의 새 정권에서 실권을 틀어쥔 것은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같은 침략적 호전분자들이었다고 지적했다. 

북한 사전은 메이지유신과 관련해 일본은 물론 남한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의 역할에 대해 부정하거나 미미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 사전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변화도 소개했다.

사전은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위로부터의 부르주아 개혁을 통해 자본주의를 이행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일본 정권은 1871년 종전의 지방분권적인 번을 없애고 부, 현을 설치 폐번치현함으로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강화했으며 중앙관제의 개혁을 실시하고 군사 관료들로 내각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 인민 탄압과 해외 침략을 강화하기 위해 징병제를 실시하고 근대적 상비군을 조직했으며 일왕 직속의 참모본부가 조직됨으로써 군부세력이 정부의 대내외정책을 좌지우지하고 극악한 군국주의 지배체계가 수립됐다고 설명했다.

사전은 일본이 농촌 지주와 부농을 자기편에 끌어들이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억압 착취하며 자본주의 발전에 적응할 수 있도록 봉건적 토지소유제를 반봉건적 토지소유제로 개편했고 중세기적 수공업조합, 상업조합과 국내 관세를 폐지했으며 자본주의적 교육제도를 도입했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이 사농공상의 중세기적 신분제도를 형식상 폐지했지만 신분적 불평등은 그대로 남았다고 소개했다. 막부통치시기 봉건 지배계급이 문벌대신으로 공, 후, 백, 자, 남의 작위를 받았으며 봉건적 특권대신에 공채를 받아 이자를 받으며 생활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메이지유신이 일본의 미약한 신흥 부르주아들이 일부 봉건들과의 타협 아래 봉건적 관계를 다분히 보존하면서 그것을 자본주의 발전에 적응시키도록 한 불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이었다고 설명했다.

때문에 메이지유신이 인민 대중에게는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다만 일본이 군사 봉건적 자본주의로 나가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북한은 뒤늦게 자본주의 발전의 길에 들어선 일본이 군사봉건적 침략성과 함께 강도적 약탈성과 교활성을 가졌다며 메이지유신 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국내에서 파쇼적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주변국 침략에 매달림으로써 일본인 뿐 아니라 조선인과 아시아인에게 커다란 재난과 불행을 들씌웠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메이지유신에 대해 이처럼 자세히 분석한 것은 김일성 주석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전은 김일성 주석이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부르주아 혁명을 거쳤고 일찍 개명해 한 때 우리나라를 강점했다”고 말했고 설명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는 계기가 메이지유신과 관련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는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과 특성 그리고 그것이 한반도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연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전의 내용으로 볼 때 북한은 일본 메이지유신이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태동과 인민들의 반봉건 요구 그리고 조슈, 사스마 등 지역 영주와 세력의 권력욕구에 의해 일어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강진규 기자  maddog@nkeconom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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